클래식이야기

  • 2016-07-27

[Why] "건우 백이랑… 근사한 꿈 꾸며 살다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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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70)가 검정 천 가방에서 작은 빗 하나를 꺼냈다. 배우 윤정희(72)가 그에게 몸을 맡기듯 서며 이렇게 말했다. "응, 여기 좀 빗어 넘겨줘요. 머리 모양이 괜찮아요" 백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머리칼을 가만히 빗어내렸다. 19일 오후 서울 혜화동 한 콘서트홀이었다.
 
 
 
1966년 1200대1 경쟁률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데뷔한 지50년. 윤정희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사랑받은 배우였다. 330여 편 영화 중 325편에서 주연을 맡았고, 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우주연상만 25번 받았다.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다섯 편이 한꺼번에 같은 날 개봉한 적도 있었다. 2010년 이집트 카이로 국제영화제에서 리처드 기어와 함께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2011년엔 이창동 감독 영화 '시'로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과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오는 9월 22일엔 한국영상자료원이 '윤정희 50주년' 행사도 연다.
 
 
 
윤정희는 남편이 빗겨준 머리를 손으로 다시 한 번 빗어 넘기고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용실을 통 안 가거든요. 꾸미는 데 쓸데없이 돈과 시간 쓰는 게 싫어요. 건우 백(그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다)이랑 파리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안 갔지요." 실로폰을 두들기듯 높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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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나 괜찮아 보여” 윤정희가 묻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빗을 꺼냈다. 윤정희는 스스럼없이 그의 앞에 섰다. 친숙한 침묵이 감도는 여름날 오후였다. 이 두 사람은 평생 이렇게 종종 서로의 비서가 되어주며 살아왔을 것이다. 머리를 다 빗은 후 윤정희는 백건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메르시(고마워).” / 오종찬 기자
 
 
미용실도 안 가는 '전설의 여배우'
 
 
 
 
―미용실을 안 가시면 머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이이(백건우)가 가위로 잘라줘요. 손재주가 좋거든요. 자기 머리칼은 거울 보고 스스로 자르고, 내 머리칼도 슬쩍슬쩍 만져주는 거죠. 세상 어떤 스타일리스트보다 나아요."
 
 
 
―화장도 남에게 안 맡기신다죠.
 
 
 
"옛날 배우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스로 했으니까요. 요즘도 종종 공식 석상에 설 때가 있는데 그때도 내 얼굴만큼은 내 손으로 단장합니다."
 
 
 
윤정희 본명은 손미자다. 6남매의 맏딸인 그는 음악을 즐겨 듣고 틈날 때마다 책을 끼고 지내던 문학소녀였다고 했다. 1966년 김래성 원작 영화 '청춘극장'을 찍기 위해 신인배우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신부를 찾아가 "배우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라"는 답을 듣고 오디션을 봤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다들 "쟤가 되겠다"고 수군거렸다. 윤정희는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서 기도를 많이 했다. 배우가 되더라도 화려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름에 고요할 정(靜)을 넣어 정희(靜姬)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영화판이 본래 화려한데 혼자만 고요하게 살 수 있나요.
 
 
 
"가능해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면 되죠. 영화 촬영 중에도 나는 틈나면 '사상계'나 '문학사상' 같은 책을 읽었어요.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차에 들어가서 바흐나 슈베르트 음악을 들었고요. 그땐 LP판이나 카세트 테이프도 워낙 귀한 시절이었는데,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가게 되면 클래식 음반을 잔뜩 사가지고 왔죠."
 
 
 
―우아한 척한다고 주위에서 싫어하진 않았습니까.
 
 
 
"글쎄… 누가 뭐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아, 이런 적은 있어요. 누구네 집으로 영화 촬영을 하러 갔는데 그 집 거실에 아주 근사한 전축이랑 음반이 있는 거예요. 그만 그 전축에 맘을 뺏겨서 잠깐 쉴 때 클래식 음악을 틀었죠. 그걸 듣고 현장에 있던 선배 하나가 '너는 왜 촬영에는 신경을 안 쓰고 딴짓을 하느냐'고 뭐라고 했어요. 그 이후로는 음악을 차에서 혼자만 들었네요."
 
 
 
―그런 새침한 문학소녀가 연기는 유독 잘했다죠.
 
 
 
"소설책을 한번 쥐면 밤을 꼴딱 새우는 게 기본이었는데, 연기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도 집중을 꽤 잘했다고 생각해요. 김수용 감독님처럼 문학적인 분들이 유독 저를 아껴주셨죠. 영화 '안개'(1967), 황순원 선생님 작품을 영화로 옮긴 '독짓는 늙은이'(1969) 같은 작품을 많이 한 것도 그 덕일 거예요."
 
 
 
윤정희 팬클럽 회장이자 영화평론가인 안규찬씨는 "윤정희가 등장하기 전 한국 영화 속 여자 주인공 캐릭터는 무척 전형적이었다. 남자를 뺏거나 남자를 빼앗기거나, 아이를 뺏거나 아이를 빼앗기는 역할이 전부였다. 윤정희가 데뷔하면서 비로소 한국 영화에도 팜므파탈부터 지적인 여성까지 복잡하고 미묘한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신성일씨와 커플 연기를 무려 99번이나 했죠.
 
 
 
"꽤 괜찮은 콤비였어요. 지금도 신성일씨는 저를 '미스 윤'이라고 불러요."
 
 
 
윤정희의 인기가 빠르게 치솟았다. 혈서를 집에 두고 가는 남성 팬이 속출했고 어딜 가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외출조차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염문도 많아졌다.
 
 
 
―높은 분들이 종종 저녁식사 자리에 오라고 했는데 끝끝내 안 갔다면서요.
 
 
 
"하루는 위(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외국에서 손님이 왔는데 제가 영어를 좀 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자리에 나와달라고. '죄송하지만 저는 기생이 아니니 나갈 수 없다'고 했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중에 제게 사과 궤짝을 보내왔어요. 제 마음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했죠(웃음)." 배우로서 뜨거웠던 7년을 보낸 윤정희는 돌연 활동을 접고 프랑스 파리 3대학(소르본대)으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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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의 데뷔작 ‘청춘극장’의 한 장면. 가운데 젊은 여성이 윤정희, 오른쪽 끝에 선 이가 신성일이다(왼쪽 사진). 2010년 카이로 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윤정희(오른쪽 위). 쥘리에트 비노슈, 오마 샤리프와 함께 섰다. 2011년 윤정희가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는 모습(오른쪽 아래). / 영화평론가 안규찬 제공
―왜 프랑스로 가신 거죠.
 
 
 
“여기선 도통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공부를 무척 하고 싶었어요. 원래는 미국으로 가려 했는데 1972년도 뮌헨올림픽에 갔다가 신상옥 감독님하고 파리에 들르면서 그곳 분위기에 반해버렸어요. 파리로 가야겠다고 맘을 고쳐먹게 된 거죠.” 당시 윤정희는 프랑스 대사에게 “파리 가서 공부를 하고 싶으니 장학금을 달라”고 요청했고 프랑스 대사관은 “장학금 제도는 없지만 에어프랑스 1등석을 내줄 순 있다”고 대답했다. 윤정희는 “1등석 타고 파리로 날아간 여배우는 내가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나의 또 다른 主語, ‘건우 백’
 
 
 
 
1973년 파리로 간 윤정희는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다. 신혼 살림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차렸다.
 
 
 
―비밀 연애를 3년쯤 하신 건가요.
 
 
 
“뭐 그런 거죠. 뮌헨올림픽 때 오페라 ‘심청’을 보러 갔다가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어요. 나중에 파리에 있는 중국집에 갔다가 우연히 재회했고요. 둘 다 이름이 알려졌으니 남들 몰래 만났죠. 그러다 결혼한 거고요.”
 
 
 
―청혼은 어떻게 하시던가요.
 
 
 
“그이도 나도 형식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웃음). 우린 여러모로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비슷했어요. 둘 다 뭔가를 억지로 계획하지도 않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법도 없었지요.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의 곁에 남기로 한 거죠.” 윤정희는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입었다. 신부 화장도 직접 했다. 예물은 실반지 한 쌍이 전부였다. 화가 이응노 선생 같은 가까운 이들 몇을 불러다 놓고 프랑스 시골 한 작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대 최고 여배우의 결혼식은 조촐하고 소박했다.
 
 
 
―여자로서 아쉬웠을 법도 한데요.
 
 
 
“전혀요.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메이드(가정부) 한번 쓴 적이 없어요. 도배도 우리 둘이 직접 했고요, 지금도 우린 자동차도 식기세척기도 없이 살아요(웃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손으로 했는데 그게 오히려 편하고 좋았어요. 그 탓에 지금 손이 이렇긴 하지만요.” 윤정희는 세월에 거칠어진 손을 내보였다. 옆에 있던 백건우가 말을 보탰다. “둘 다 물질에 큰 관심이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종종 불러놓고 대접할 수 있는 만큼만 벌면 그만인 거죠.”
 
 
 
윤정희는 이후로 20여 편의 영화를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찍었다.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1977)과 ‘야행’(1977), 엄종선 감독의 ‘만무방’(1994) 같은 걸출한 작품도 이때 나왔다. 1987년엔 파리3대학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기까지 14년이 걸렸네요.
 
 
 
“딸아이(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를 낳아 기르고, 중간중간 영화를 찍으면서 공부했으니까요. 대충 모양으로 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논문을 썼어요. 이두용 감독님 영화 ‘물레야 물레야’를 바탕으로 한 한국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의 모습에 대해 연구를 했거든요.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자부심이 크죠.”
 
 
 
윤정희는 영화 촬영 시간을 빼면 늘 백건우와 함께 있었다. 그가 연습할 때 옆에서 지켜봤고 연주회를 위해 전 세계를 따라다니며 그를 챙겼다. 윤정희는 “지금도 남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객석에 앉을 때가 제일 긴장된다”고 했다.
 
 
 
―어떤 국제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남편 연주 일정과 겹쳐서 사양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땐 남편 연주회 일정이 워낙 중요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상이란 건 나중에 또 받을 수도 있고요. 제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죠.”
 
 
 
―아무리 남편을 사랑한다지만 늘 함께 다니는 게 힘들 수도 있을 텐데요.
 
 
 
윤정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란 눈동자가 더 커졌다. “왜 힘들죠” 윤정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글쎄요,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나는 남편의 연주를 들으며 사는 게 좋아요. 음악을 워낙 좋아하니까요. 남편이 새로운 곡을 연주할 때 그 변화를 매일같이 지켜보는 건 남들이 알 수 없는 큰 행복이에요. 첫날엔 남편이 곡이 잘 안 풀리는지 한숨을 쉬곤 하는데, 하루 이틀 지나면 표정이 점점 밝아져요. 피아노 소리도 점점 달라지고요. 그가 그렇게 실타래를 푸는 걸 매일 지켜볼 수 있으니 행운 아닌가요 반대로 남편은 연주하는 스트레스를 늘 영화로 푸는데 내가 영화배우이니 함께 늘 영화를 보고 영화 얘기를 할 수 있지요. 우린 운이 참 좋아요.”
 
 
 
―백건우를 뺀 윤정희는 어떤 사람입니까.
 
 
 
윤정희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지금의 내 모습은 건우 백과 함께 만든 거예요. 우린 사치를 피곤해하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을 즐겨요. 남편이 스페인, 이탈리아, 이스라엘 같은 곳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같이 손을 잡고 곳곳을 보러 다니죠. 둘이서 함께 아름다운 장소를 정말 많이 다녔고, 눈부시게 근사한 장면들을 참 많이 봤어요. 그런 순간들을 그렇게 평생 함께하며 살았으니 건우 백의 삶과 내 삶은 어느덧 같은 것이 되었겠죠.”
 
 
 
윤정희는 휴대전화 한 대를 남편과 같이 쓴다. 늘 함께 다니니 굳이 전화기 두 대가 필요 없다고 했다.
 
 
 
―사생활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럴 필요가 있나요(웃음). 남편 친구가 내 친구이고, 내 친구가 남편 친구인 걸요!”
 
 
 
두 사람은 얼마 전 결혼 40주년을 맞았다. “기념일에 어디를 갔느냐”고 묻자 백건우는 “그동안 둘이 함께 안 다녀본 데가 없어서 어딜 가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처음 파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중국집을 찾아가봤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곳에서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다. 샴페인조차 필요 없는 완벽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지금처럼 마지막까지
 
 
 
 
2011년 윤정희는 영화 ‘시’에서 치매 노인 ‘미자’를 연기했다. 윤정희는 “갈수록 좋은 영화를 찾기가 힘들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그런 나를 위해 마치 선물처럼 그 영화가 다가왔다”고 했다.
 
 
 
―당시 노출 장면을 찍을 때 고심을 많이 하셨다죠.
 
 
 
“한창 활동할 때도 노출 장면은 안 찍었거든요. 그땐 대역이 있었어요. 남편하고 한참 의논하다가 뒷모습을 보여주는 걸로 합의를 봤죠.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반면에 요즘엔 다들 참 용기 있어요. 후배들을 보면 대단해 보여요.”
 
 
 
―요즘도 시나리오를 계속 고르고 계신가요.
 
 
 
“맞아요. 2~3개 받아놓은 게 있는데 기다리던 그 작품이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보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영화를 찍다 죽고 싶어요. 남편이 악기를 두들겨 인생을 그려내는 사람이라면, 나는 몸을 움직여 삶을 그리는 게 직업이니까요. 이것보다 근사한 게 어디 있겠어요. 죽을 때까지 배우를 하다 갈 거예요.”
 
 
 
―‘그 작품’이라는 게 어떤 걸까요.
 
 
 
“우리 나이 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삶이라는 게 젊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도 근사한 거 아니에요 추하지 않고 의연하고 건강한 늙음… 그걸 담아낼 수 있는 영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삶의 마지막 모습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입니까.
 
 
 
윤정희는 백건우를 조용히 바라보며 “여보” 하고 불렀다. “당신이 내게 늘 그랬잖아. ‘평생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데 계속 꿈만 꾸다가 가고 싶은데 어쩌지.” 백건우가 윤정희 말에 느릿느릿 답했다. “응. 가끔 당신을 보면 고무풍선 같아. 내가 손을 뻗어서 현실이라는 땅으로 끌어내려도 당신은 다시 둥실 떠오르지. 근데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순수한 당신이 좋아. 당신이 부러워.”
 
 
 
윤정희가 웃었다. “들으셨죠. 나는 마지막까지 자잘하고 세속적인 문제들로 지지고 볶고 살기보단 이렇게 아이처럼 근사한 꿈을 꾸면서 살다 갈래요. 돈이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더 성공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을래요. 그저 더 멋진 영화, 더 아름다운 음악, 더 멋진 인생만 생각하다가 떠날래요. 건우 백이랑 그렇게 예술적으로 살다가 갈래요. 괜찮지 않아요”
 
 
 
그의 말이 문득 시(詩)처럼 들렸다. 어쩌면 지금껏 윤정희는 줄곧 그렇게 낭송을 해온 건지도 모른다.
 
 
< 2016년 7월 23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