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01-06

[리뷰] 현대적 해석과 전통적 사운드의 베토벤 교향곡 9번 'KBS교향악단 제7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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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베토벤은 말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대와 음반시장에서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대에 따른 베토벤 연주 스타일의 변화는 곧 클래식 연주스타일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 교향곡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명함’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요엘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호흡을 맞춘 지 3년이 흘렀다. 지휘자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오케스트라에 베어들었을 시간이다. 지난 제713회 정기연주회 무대에서 선보인 교향곡 9번 연주는 레비와 KBS교향악단의 명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엘 레비는 날렵한 현대적 해석에 중훈한 전통적 사운드를 결합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홈페이지)

연주 스타일에 따른 연주시간의 변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연주사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연주는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ngler)가 지휘한 1951년 7월 29일 바이로이트 축제 재개막 공연일 것이다. 이 연주는 이른바 거장풍 연주의 전형으로 연주시간이 가장 먼저 눈에 띤다. 음반에 표기된 악장별 연주시간을 보면 1악장-17분 5초, 2악장-12분, 3악장-19분 32초, 4악장-24분 59초로 총 연주시간은 74분 23초다.

그런데 1998년 데이비드 진먼(David Zinman)이 취리히 톤할레-오케스트라(Tonhalle Orchestra Zurich)와 흥미로운 연주를 내놓았다. ‘베레라이터(B?renreiter) 에디션’에 의한 연주였다. 베렌라이터 에디션은 영국의 음악학자 조나단 델 마르(Jonathan Del Mar)가 이전까지널리 사용되던 ‘브라이트코프 운트 하르텔(breitkopf & h?rtel) 에디션’의 오류를 수정해 출판한 것으로 조나단 델 마르 에디션으로 불리기도 한다, 진먼은 이 악보에 따라 베토벤이 의도한 템포와 연주 규모를 지켜 연주한 것이다. 각 악장별 연주시간은 1악장-13분 35초, 2악장-12분 11초, 3악장-11분 31초, 4악장 21분 40초로 총 연주시간은 59분 23초다.

베렌라이터 에디션은 이제 세계의 정상급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두루 사용하고 있으며 이후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등이 이 악보를 사용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완성한 바 있다. 21세기의 연주 스타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베렌라이터 에디션을 사용한 연주의 연주시간이 대체로 짧은 걸 확인할 수 있다. 베토벤이 지정한 템포를 그대로 지킨 결과다. 그런데 2악장의 경우엔 진먼의 연주가 11초 더 길다. 이것은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2악장의 반복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진먼은 모든 반복지시를 그대로 지켜서 연주했다.

베토벤 교향곡 연주사에서 베렌라이터 에디션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봐도 20세기와 21세기를 나누는 기점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레비와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어디쯤 위치한 것일까. 20세기? 아니면 21세기?

20세기와 21세기의 절충주의
결론부터 말하면 20세기와 21세기 그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절충주의라고 표현해도 좋다. 전체적인 해석의 결은 빠르기, 강약조절 등 악보의 지시를 충실히 지킨 연주지만 전체적인 사운드는 이른바 거장의 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중후반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베렌라이터 에디션을 사용한 21세기 연주들은 대부분 빠르고 날렵하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이것이 베토벤의 의도에 가깝다. 하지만 반대 입장도 있다. 도르트문트대학의 음악학 교수 마르틴 게크(Martin Geck)는 자신의 책 ‘혹등고래가 오페라극장에 간다면’에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의 귀와 음악적 감성은 현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레비가 KBS교향악단과 선보인 연주는 게크의 주장에 상당히 부합하는 면이 있다.

레비는 먼저 콘트라베이스를 9대 배치했다. 두터운 현악으로 유명한 카라얀의 경우에도 콘트라베이스를 8대 배치한 것을 보면 레비가 얼마나 두터운 음향을 추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음악의 다이내믹을 경험한 우리의 귀는 베토벤 당시의 작은 편성을 빈약하게 느낄 가능성이 높다. 레비는 현재적인 편성과 뚜렷한 다이내믹으로 웅장한 음향을 추구했다.

연주시간을 살펴보자. 1악장은 16분 50초로 느린 편이지만 푸르트벵글러가 반복을 일부 생략한 점을 고려한다면 아주 느린 연주는 아니었다. 레비는 이른반 도입부의 ‘안개 낀 6연음’에서 다소 느린 템포를 유지하며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베렌라이터 에디션을 사용한 연주에선 느끼기 어려운 음향이었다.

2악장은 9분 51초로 일부 반복을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반복을 생략했기 때문에 연주시간이 짧아진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상당히 속도감 있는 연주였다. 또한 팀파니의 강렬한 타격 이후 9마디부터 제2바이올린이 주제를 연주하는데 13마디에서 비올라가, 17마디에서 첼로가, 21마디에서 제1바이올린이 차례로 가세하는 과정에서 박보의 지시대로 아주 여린 음량을 유지한(sempre pp) 연주는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베토벤은 환희(Freude)안에서 모든 인간이현제가 된다고 노래한다

풍부하고 안정적인 사운드
3악장의 연주시간은 14분 47초로 베토벤이 기록한 메트로놈 템포에 가장 충실한 악작이었다. 이소란 객원악장이 이끈 KBS교향악단의 현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 가운데 안정적인 소리를 들려줬다. 화려함은 덜하지만 대신 목가적 아름다움이 드러난 연주였다.

4악장은 팀파니를 비롯한 관악기의 강렬한 연주로 시작했다. 연주시간은 24분 39초. 레비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환희의 송가 주제를 연주하기 전까지 빠르게 연주했다. 그런데 환희의 송가 주제에선 템포를 다소 떨어뜨리고 차분하게 연주했다. 4악장 도입부의 빠르기말은 ‘빠르게’(Presto), 환희의 송가 주제는 ‘몹시 빠르게’(Allegro assai)로 기록돼 있다. 표현상 환희의 송가 주제가 더 빨라야 할 것 같지만 베토벤이 기록한 메트로놈 빠르기에 의하면 환희의 송가 주제가 다소 느린 게 맞다.

이날 솔리스트들의 가창은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성량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거대한 음량 가운데서도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했다. 합창단의 소리는 매우 단단했다. 특히 환희의 송가 부분에선 풍성한 성량으로 연주홀을 가득 채우면서도 뚜렷한 발음으로 리듬감이 살아있는 연주를 선보였다. 레비는 솔리스트와 합창단의 프레이즈를 간결하게 가져갔다. 그로 인해 각 성부가 다른 성부를 방해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배음이 이뤄지게 했다. 환희의 송가를 지나 레비는 합창이 ‘저 별들 너머에 창조주가 계신다’(Ueber sternen muss er wohnen)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 잠시 템포를 떨어뜨린 이후 다시 템포를 높여 피날레까지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가며 연주를 마무리 지었다.

합창 교향곡의 원형, 합창 환상곡
레비는 교향곡 9번 “합창” 연주 전 음악회 1부에 합창 환상곡을 무에 올렸다. 이 곡은 합창 교향곡을 작곡하기 전 베토벤이 실험적으로 선보인 곡으로 합창 환상곡의 발상이 어떻게 합창 교향곡으로 발전했는지 비켜볼 수 있어 연주회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했다.

이날 연주에서 피아니스트 김영호가 솔리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불필요한 루바토는 일체 배재한 깔끔한 연주를 들려줬다, 한 예로 피아노의 긴 서주가 마치고 호른과 오보에가 번갈아가며 팡파르를 연주하면 피아노는 팡파르의 주제를 그대로 받아 다시 독주를 이어 나간다. 여기서 바렌보임 같은 경우엔 첫 두 마디에 루바토(rubato, 특정 음을 길게 끄는 것)를 사용해 낭만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김영호는 전혀 음을 끌지 않았다. 호른과 오보에 팡파르에 늘임표가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아무 지시가 없는 바로 다음 마디에 루바토를 사용하는 김영호의 해석이 베토벤의 의도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레비는 합창 환상곡의 피날레에서 이후에 연주할 교향곡 9번을 염두에 둔 듯 폭발적인 피날레를 연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맥 빠진 연주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합창단의 풍성한 성량은 무대를 가득 채웠고 오케스트라 역시 충분한 음향으로 연주했다. 다만 평소처럼 강렬한 다이내믹으로 짜릿하게 마무리 하지 않았을 뿐이다.

▲레비와 KBS교향악단은 지난 3년간 꾸준히 더 나은 소리를 들려줬다 (사진: KBS교향악단 홈페이지)

1년 후가 더 기대되는 레비와 KBS교향악단의 베토벤
베토벤 교향곡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명함이다. 이날 레비와 KBS교향악단은 현대적인 날렵한 해석과 전통적인 중후한 사운드를 조합해 매력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어디에서나 충분히 자신 있게 내밀 수 있는 명함임에 분명하다. 이만한 사운드를 선보인 KBS교향악단에 박수를 보낸다. 

2017년 KBS교향악단은 말러 교향곡 3번을 시작으로 베토벤, 브람스, 슈만, 브루크너 등 전통적인 게르만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연주회를 꾸릴 계획이다. 아울러 쇼스타코비치, 파야, 힌데미트 등 의욕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인 2017년 12월 30일 이들은 또다시 교향곡 9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레비가 또 얼마나 KBS교향악단의 소리를 다듬어 낼지 궁금하다. 지난 3년간 꾸준히 더 나은 소리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KBS교향악단 제713회 정기연주회
12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요엘 레비
협연: 피아니스트 김영호, 소프라노 강혜정,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조영화, 테너 이명헌, 베이스 손혜수, 김형수
연주: KBS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부천시립합창단, 서울시합창단

프로그램
베토벤: 합창 환상곡 C단조 op. 80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 op. 125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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