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02-27

[리뷰] 철저한 계산과 인내로 연주한 영원의 시간 'KBS교향악단 제714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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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말러 교향곡 3번의 연주시간은 100분이 넘는다. 길기로 유명한 말러 교향곡들 중에서도 가장 길다. 

연주시간만 긴 게 아니다. 말러 교향곡 3번에서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 혼돈의 시간으로부터 영원한 사랑 그 자체인 신을 말하고 있다.

말러가 교향곡 3번에서 이룩한 거대한 세계, 혼돈에서부터 영원한 신의 사랑을 연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내일 것이다. 말러가 천착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성경은 ‘사랑이란 인내하는 것’(고전 13:4)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러 교향곡 3번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진: 미우주항공국 홈페이지)

23분에 이르는 거대한 아첼레란도
레비는 1악장을 거시적 관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아첼레란도(accelerando, 점점 빠르게)로 보는 듯했다. 정확히 도입부 호른의 힘차고 단호한(Kra?ftig. Entschieden) 팡파르에서부터 똑같은 팡파르가 반복되는 1악장 3/4지점까지 레비는 서서히 템포를 높여가며 정서적 고양을 이끌어 냈다.

도입부 팡파르는 느린 템포로 신중하게 진행됐다. 그렇다고 악상에 담김 정서나 표현이 흐릿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템포는 느리지만 악보에 표시된 그대로 힘차고 단호한 울림이었다. 하지만 팡파르는 이내 잦아들고 천지창조 이전의 우주를 상징하듯 혼란스런 음형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이 부분은 음량도 들릴 듯 말 듯 작은데다 뚜렷한 멜로디를 찾기도 쉽지 않아 산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 지휘자들은 악보가 말하는 이상의 표현을 시도하기도 한다. 레비는 인내하며 차분한 템포와 미세한 울림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영원한 시간으로 향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휘자의 인내는 133마디에서 한 번 더 시험 받는다. 미세한 떨림의 연주가 끝나고 플루트가 목신 판의 주제를 연주하며 템포가 빨라지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숨 막히게 억눌렀던 감정이 한 순간에 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비와 KBS교향악단은 철저히 계산된 대로 칼 같은 연주를 이어나갔다.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은 악장 전체에 걸쳐 진행되는 거대한 아첼레란도에 관해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1악장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1악장의 아첼레란도는) 5분가량 되는 시간을 두고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데, 단계별로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조금씩 빨라지기 때문에 템포 변화가 귀로 감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몸으로는 그 효과가 느껴져야 한다. …이런 거대한 음악적 힘은 정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톰 서비스, 마에스트로의 리허설 198p).

아첼레란도의 힘은 거대해서 적절히 사용하면 그 효과는 엄청나다. 하지만 앞서 래틀이 지적한 바대로 이런 거대한 음악적 힘은 정밀하게 통제되어야 하며 당연하게도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날 연주에서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보여준 거대한 아첼레란도는 래틀과 베를린 필이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연주에서 시도한 것보다 한 단계 더 난해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래들의 경우보다 훨씬 긴 23분여의 시간동안 서서히 빨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말러 교향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악장의 아첼레란도가 이후 연주의 프롤로그와도 같은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레비와 KBS교향악단 음악의 거대한 힘을 보여줬다 (사진: KBS교향악단 페이스북)

복잡한 실타래를 명쾌하게 풀어낸 레비의 해석
23분에 이르는 아첼레란도는 연주의 기술적인 면에서도 인상적이었지만 어떤 선율도 단순하게 등장하는 법이 없는 말러 교향곡에서 이뤄냈다는 점에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레비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선율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먼저 한 예로 이탈리아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의 방법을 살펴보자. 샤이는 2000년대 초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오케스트라(Royal Concertgebouw Orchestra)와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을 진행할 당시 전체적으로 느린 템포를 고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주제 선율들을 느린 템포 속에서 명쾌하게 분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샤이의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2003년 샤이와 로열콘세르트허바우가 연주한 말러 교향곡 3번 연주는 이미 21세기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다른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는 여분의 울림을 덜어낸 투명한 음색으로 악기간의 분리도를 명쾌하게 실현함으로 성과를 이뤄냈다.

레비는 경우는 샤이와 아바도 그 사이에서 방법론을 찾은 듯했다. 다소 느린 템포로 1악장을 시작한 탓에 132마디까지의 산만한 주제들의 동시다발적인 등장을 정밀하게 통제해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대한 아첼레란도를 설계한 부산물이다. 복잡한 주제를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느린 템포를 취한 것은 아니란 의미다. 따라서 샤이의 방법론과 비슷한 맥락을 취하곤 있지만 그 방향성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악기간의 분리도를 명확히 하는 점에서 레비는 아바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레비는 리허설에서 단원들에게 ‘세퍼레이션’(separation)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세퍼레이션은 ‘분리’ ‘구분’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악기간의 음색을 분리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고 볼 수 있다. 3악장 도입부를 예로 들어보자.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피치카토를 바탕으로 목관악기들이 새들의 울음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3마디부터 등장하는 클라리넷의 음형은 음표를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legato) 주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어 5마디부터 등장하는 피콜로는 클라리넷과 대조를 이루는 스타카토(Staccato) 주법으로 음을 짧게 연주하도록 했다. 두 악기가 서로 다른 음형을 동시에 연주하지만 주법의 차이로 대조를 이뤄 다양한 주제를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연주 전체로 확대된 거대한 아첼레란도
23분에 이르는 아첼레란도는 정서적인 면에서 연주 전체의 프롤로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비는 1악장의 아첼레란도처럼 피날레를 정서적 절정으로 보고 서서히 연주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템포도 마찬가지다. 연주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빨라지는 인상이었다. 3악장은 해학적으로(scherzando) 연주하라는 말러의 지시에 따라 우스꽝스러운 주제들을 경쾌하게 연주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폭발하는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스케르초 악장(3악장)은 가장 우스꽝스러우면서 동시에 가장 비극적이다”며 “그 속엔 소름끼치고 무서운 유머가 있는데 우리는 웃음보다 공포에 압도된다”고 말한 말러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3악장의 공포는 그대로 4악장에서 “깊은 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Was spricht die tiefe Mitternacht)라는 메조소프라노의 질문으로 승화된다. 이날 독창자로 무대에 오른 수잔 플라츠의 노래는 압도적인 성량이나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대신 사색적인 정서로 말러의 고뇌를 그대로 전하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이어지는 5악장의 어린이합창과 여성합창은 깨끗한 소리가 오히려 소름끼치는 공포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하는 듯했다. “세 천사가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Es sungen drei Engel einen s?ßen Gesang)는 가사에 따르자면 밝고 행복한 정서에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 말러는 일방적인 정서적 흐름을 거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소름끼치는 합창의 연출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마지막 울림으로 우주는 신의 사랑 안에 안식을 얻었다.

마지막 한 순간 육감적인 피날레
매우 여린(pp) 소리로 6악장은 시작한다. 레비가 매끈하게 다듬어낸 KBS교향악단의 현은 한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듯 이어졌다. 이날 바이올린은 객원악장인 세미온 가브리코프가 이끌었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리드로 6악장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바이올린 독주에서도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음색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비는 6악장에 이르러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저음현이 풍성하게 오케스트라를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몽환적인 음색의 연주였지만 레비는 이성의 끈을 굳게 움켜쥐고 오케스트라를 정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사이먼 래틀의 말처럼 이런 거대한 음악적 힘은 정밀하게 통제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비도 단 한순간 마지막 3마디에선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렸다. 그렇게 100여분의 정밀한 통제와 인내 후에 폭발시킨 마지막 화음은 육감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레비는 이내 마지막 울림을 매듭지었다. 철저한 계산과 끈질긴 인내도 쌓아올린 영원의 시간을 향한 연주였다.

KBS교향악단 제714회 정기연주회
1월 25일 롯데콘서트홀
지휘: 요엘 레비
협연: 메조소프라노 수잔 플라츠
연주: KBS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서울시합창단,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

프로그램
말러: 교향곡 03번 D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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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6341340&memberNo=7039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