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 2017-02-27

[리뷰] 스페인에도 가끔은 흐린 날이 있다 'KBS교향악단 제715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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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인뉴스 권고든의 곧은 클래식]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독일 음악은 독일 연주자가, 러시아 음악은 러시아 연주자가 최고라고.

과연 그럴까? 베토벤을 예로 들어보자. 21세기 베토벤 교향곡 연주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지휘자. 데이비드 진만(David Zinman),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는 각각 미국인과 이탈리아인이다.
▲레비와 KBS교향악단은 스페인 레퍼토리를 자신만의 색깔로 연주했다. (사진: KBS교향악단 홈페이지)

베토벤뿐만이 아니다. 비교적 우리나라에서 낯선 스페인 레퍼토리라고 해서 한국 교향악단이 훌륭하게 연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요엘 레비(Yoel Levi)와 KBS교향악단이 스페인 근대음악의 기수들이 남긴 작품으로 무대를 채우겠다고 했을 때 다소 우려스런 것은 사실이었다.

바로 음색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레비의 조탁으로 KBS교향악단의 음색은 두터워지고 무게가 실렸다. 그런데 스페인 레퍼토리는 밝고 가벼운 음색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인 특성이다. 여기서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음색의 충돌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스페인 근대음악의 기수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성과 지휘자로서 레비의 음악적 방향성의 충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은 흔히 만국공용어라고 한다. 지역과 언어, 문화를 넘어 마음을 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게 음악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스페인 음악이 요구하는 음색과 KBS교향악단이 가진 음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이룰 여지가 있지 않을까. 레비의 선택은 무엇일까.

▲스페인 중부의 도시 아란후에스. (사진: 스페인 관광청)

세비야에서 출발하는 스페인 여행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마련한 스페인 음악 여행은 세비야(Sevilla)에서 출발했다. 첫 무대를 장식한 ‘환상적인 무곡’의 작곡가 호아킨 투리나(Joaqu?n Turina)는 1882년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세비야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또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로도 유명하다.

투리나의 음악엔 스페인 전통의 축제적 분위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상적 무곡의 시작은 고요하다. 가늘고 여린 바이올린 소리가 마치 아직 충분히 디켄팅(Decanting)이 되지 않은 스페인 와인처럼 느껴졌다. KBS교향악단의 밀도 높은 바이올린 소리와 단단한 저음은 스페인보단 좀 더 북쪽의 추운 지방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팀파니의 타격과 함께 음악의 템포가 높아지고 열기가 더해지자 단단하게 닫혀있던 와인향은 금새 풍부하게 꽃을 피웠다.

KBS교향악단의 두터운 현악과 풍성한 관악이 무대를 가득 채우자 금방 축제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레비는 스페인의 향기를 내기 위해 팀파니의 타격음을 비교적 가볍게 가져가고 관악기의 잔향을 다소간 제한함으로 깔끔한 울림을 선보였지만 스페인 음악이라고 하기엔 달콤함이 부족했다. 확실히 담백하고 사색적인 느낌이 담겨있었다.

아란후에스를 지나 그라나다로
세비야에서 출발한 스페인 음악 여행은 중앙부의 작은 도시 아란후에스(Aranjuez)로 이어졌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동부의 발렌시아 출신이다. 그는 3세 때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이곡의 영감이 된 아란후에스 궁전을 본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이날 연주된 곡들과 비교했을 때 스페인 음악 특유의 색채감은 덜한 편이다.

▲기타리스트 라파엘 아귀레는 자유분방한 뜨거운 연주를 들려줬다.(사진: 아귀레 페이스북)

협연자로 무대에 오른 기타리스트 라파엘 아귀레(Rafael Aguirre)는 세고비아(Andr?s Segovia), 예페즈(Narciso Yepes)의 뒤를 잇는 스페니시 기타의 젊은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아귀레는 기타의 현을 쓸어내리는 스트럼 주법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6/8박자로 진행되는 스페인 민속음악의 특징이 담긴 도입부다. 그런데 아귀레의 연주는 일반적인 연주보다 눈에 띄게 느린 템포를 취했다. 레비가 스페인 레퍼토리를 연주하는데 있어 가장 우려스런 부분이기도 했다. 

레비는 될 수 있으면 악보에 표기된 템포를 그대로 지키려는 성향이 강하다. 반면 아귀레는 스페인 특유의 자유로움을 간직한 연주자다. 동시에 두 사람은 높은 완성도의 연주를 갈망하는 음악인기도 했다. 이들이 찾은 타협점은 이것이다. 기타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부분에선 레비의 해석을 존중하되 기타가 솔로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아귀레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 이러한 둘의 타협점을 염두에 두고 도입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기타가 스트럼 주법으로 느린 템포로 연주를 시작하고 템포를 서서히 빠르게 연주해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악보에 표기된 본래 템포를 회복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귀레와 레비는 서로의 견해 차이에도 비롯하고 매끄러운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KBS교향악단의 두터운 음색은 2악장의 정서를 극대화 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날 연주된 모든 음악 가운데 아란후에스 협주곡 2악장은 가장 어두운 정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6마디에 걸친 24번의 애절한 기타의 울림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심장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기타 반주 음형을 바탕으로 잉글리시 호른이 주제를 연주하는데 과도하게 슬픔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아버지의 정서를 담백하게 담아냈다.

특히 2악장 말미 아귀레가 들려준 카덴차(Cadenza, 독주악기의 기교적인 부분)는 단순히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정서를 진하게 담아내 이날 연주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중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아란후에스에서 로드리고의 애절함을 지켜본 스페인 음악 여행은 다시 남부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귀레가 앙코르로 라라(Agust?n Lara)의 그라나다(Granada)를 연주한 것이다. 독주곡이기 아귀레의 자유분방함이 최대한 발휘된 연주로 절묘한 템포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의 중심 마드리드에서 이어진 로드리고와 파야의 인연
로드리고가 스페인의 정서를 담뿍 머금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파야(Manuel de Falla)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에 내전이 발생했다. 이때 파야는 로드리고가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했다. 훗날 로드리고는 “파야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내전 중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내전이마친 1939년 마드리드로 돌아와 완성한 것이다.

이날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에 이어 파야의 ‘삼각모자’를 연주한 것은 이러한 로드리고와 파야의 인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레비의 빠른 템포는 파야의 셋잇단음표와 아포자투라를 돋보이게 했다.

첫 3마디의 팀파니 타격만으로도 이날 연주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삼각모자’는 발레음악으로 디아길레프(Sergey Diaghilev)의 의뢰를 받아 파야가 작곡했다. 발레음악의 템포는 안무가와 무용수들에 의해 정해지는 게 관례다. 아무래도 무용수가 안무를 소화하기 용이한 템포가 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는 이러한 관례를 지킬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 처음부터 작곡가가 지시한 템포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를 그대로 지켜 연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템포를 끌어 올린 것은 아니다. 작곡가가 알레그로 다음에 ‘마 농 트로포(ma non troppo, 그러니 지나치지 않게)라고 적어 뒀기 때문이다.

레비가 고수한 악보대로의 빠른 템포는 파야가 곳곳에 배치한 셋잇단음표, 아포자투라(appoggiatura, 본음 앞의 꾸밈음) 등과 만나 스페인 특유의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KBS교향악단 특유의 무게감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리듬감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스페인 음악에서 기대할 수 있는 뜨겁고 육감적인 음향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날의 연주가 잘못된 연주라고 보기는 힘들다. 보편적으로 좋은 연주가 갖춰야할 여러 요소들 예컨대 풍성한 울림, 명징한 다이내믹 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엔 3가지가 있다. 첫째로 음악적 기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의 특징을 분석하고 기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 음악에 담긴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춰볼 때 레비는 스페인 음악의 특징이나 기법을 그대로 따라 해서 비슷한 소리를 내기보다는 스페인 특유의 열정과 생기를 녹여내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1차적으론 스페인 음악가들의 연주와 비교했을 때 뜨거움은 덜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열정과 생기에 한 발 더 다가 선 것이다. 스페인에도 가끔은 흐린 날이 있듯이.

다시 세비야로
레비와 KBS교향악단이 마련한 스페인 음악 여행은 다시 세비야로 돌아와 마무리됐다. 레비는 앙코르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2막에 등장하는 ‘신나는 트라이앵글 소리’(Les tringles des sistres tintaient)를 연주했다. 이른 바 ‘집시의 노래’(Gypsy Song)로 알려진 곡이다. 현악기의 피치카토를 반주로 플루트가 안달루시아 지방의 분위기를 담은 멜로디를 연주한다. 레비는 서서히 템포를 올려 이윽고 피날레에선 관능적인 연주로 마무리했다.

어느 곡에서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
레비는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계약 연장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서 레비는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어떤 곡이든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로 만들겠다고 했다.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를 확장한다는 것은 지휘자의 레퍼토리를 확장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날 연주회에서 선보인 스페인 레퍼토리는 이러한 레비의 비전 중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레비는 지난 3년간 정기연주회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제외하곤 어느 곡이든 두 번 연주한 적이 없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겠다는 의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KBS교향악단 제715회 정기연주회
2월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요엘 레비
협연: 기타리스트 라파엘 아귀레,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연주: KBS교향악단

프로그램
투리나: 환상적인 무곡 op. 22 
로드리고: 아란후에스 협주곡 
라라: 그라나다 (앙코르)
파야: 삼각모자 G. 53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제2막 '집시의 노래' (앙코르)

권고든 withinnews@gmail.com

 

원문: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6606736&memberNo=7039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