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교향악단 정기무대 서는 지휘자
피아니스트 꿈꾸다 지휘에 흠뻑 매료
美 보스턴심포니 첫 여성 부지휘자 등
‘최초’ 역사 쓰며 음악계 ‘금녀의 벽’ 깨
파질 사이 피아노 협주곡 ‘물’ 초연 눈길
“단원들 마음껏 날게 하는 게 내 역할”
“투세븐티원(2701) 다시 한번 가죠… 아니, 다시… 자, 이렇게 다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KBS교향악단 연습실. 지휘자 성시연(48)은 덴마크 작곡가 카를 닐센(1865∼1931)의 ‘헬리오스 서곡’ 연습 중 특히 금관악기 연주자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을 지시하면서 악보의 특정 구간 연주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 덕분인지 처음엔 까끌까끌해 귀에 거슬리던 금관악기군(브라스) 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끄럽고 편안하게 들렸다. 그제서야 성시연은 ‘OK’ 사인을 보내며 다음 장으로 악보를 넘겼다. 연습 후 만난 성시연은 “닐센 곡은 브라스(금관악기)의 밸런스(균형)가 무너지면 오케스트라 소리 전체가 시끄럽게 들리기 때문에 브라스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들쑥날쑥한 브라스 밸런스가 유려하게 맞춰질 때까지 해당 구간(2701)을 연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헬리오스 서곡’은 그가 19일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 데뷔 무대(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들려줄 작품 중 첫 곡이다. 이외에 튀르키예 출신 피아니스트 파질 사이(53)가 작곡한 곡으로 함께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피아노 협주곡 ‘물’과 베버의 ‘오베론’ 서곡,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 교향곡’을 차례로 들려준다. 국내 국공립교향악단 최초로 여성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4∼2017)를 하고 해외로 나간 후 드물게 내한하는 성시연의 독창적인 색깔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는 경기필을 이끌 당시 악단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안주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관두고 나왔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지휘자의 역량을 넘어설 수 없다고 봤어요.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거울인 셈입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맡고 있으면 그것밖에 안 되겠다. 더 큰 지휘자가 돼 돌아오면 한국 음악계에 좀 더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성시연은 원래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1994년 서울예고를 졸업한 뒤 스위스 취리히음대에 들어갔고, 1996년에는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로 옮겨 피아노 공부를 이어 갔다. 그러다 26세 때인 2001년 갑자기 ‘지휘자가 되겠다’며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지휘과에 입학했고, 당시 세계적 지휘 거장 푸르트벵글러(독일, 1886∼1954)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영상(브람스 교향곡 4번)을 보고 반해 버렸다.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리면 단원들의 응집력을 최고로 끌어올려 최상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지 놀란 순간 ‘저런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어요.”
그는 2007년 타계한 스승 롤프 로이터 교수의 가르침(‘음악을 숭고하게, 종교처럼 생각하라’)을 가슴에 새기고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지휘 공부에 매진했다. 이듬해 오페라 ‘마술피리’ 지휘로 데뷔하는 등 실전 경험도 차곡차곡 쌓더니 2006년 게오르그 솔티 콩쿠르 우승에 이어 2007년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미국 명문 악단 보스턴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2007∼2009)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첫 여성 부지휘자(2009∼2013)로 발탁되는 등 국내외에서 ‘여성 최초’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2021년에는 세계 최정상 악단인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를 지휘했고,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할리우드볼에서 LA필하모닉,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협연해 갈채를 받았다. 성시연은 임윤찬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 같다”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력한 힘에다 변화무쌍한 감정의 라인이 너무 아름답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며 탐험하는 기분이랄까”라고 놀라움을 내비쳤다.
어느덧 데뷔한 지 20년이 넘고 올해부터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의 수석 객원지휘자로도 활약 중인 그는 연습은 혹독하게 하되 공연 때는 단원들이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끌어 주는 지휘자다. “무대에선 자연스럽게 지휘자가 스포트라이트(집중 조명)를 받게 되지만 사실 지휘자는 연주자 없이 절대로 혼자 설 수 없는 존재예요. (악단 전체가) 함께 호흡하고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단원들이 마음껏 날아오르게 하고 싶습니다.”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856198?sid=103